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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SUNDAY SERMON

유월절과 종려주일

요 12:12-19

유월절과 종려주일이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종려주일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는데요. 무엇을 중심으로 기록했냐면 12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 라고 합니다. 12절에는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라고 합니다. 20절에도 명절에라고 기록하고 있고, 13장 1절에는 유월절 전에라고 기록합니다. 주님의 종려주일을 기록하면서 그 기록이 유월절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석 연휴하며 며칠간 명절로 지키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유월절 명절을 7일간 지킵니다. 지금도 그런데요. 첫날은 국가공휴일이고 5일간 일을 해도 되고 마지막 7일에도 공휴일입니다. 이렇게 7일간 유월절 명절을 지킵니다. 이 풍습은 유월절 엿새 전에 라고 하고 또 그 이튿날 명절에라고 하는 걸 보면 2천년전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때에도 지키던 풍습인 것 같지요? 그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2천년전인 당시에도 유월절 풍습을 지켰는데 이 유월절의 풍습이 시작된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애굽에서 나온 근 3천 5백년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도 천오백년을 지켰고, 그 후 이천년이 되도록 지켜온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풍습이며 명절입니다.

 

종려주일은 이 유월절 명절 기간에 있습니다. 그 이튿날이라고 하니 유월절 닷새전이 종려주일이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것은 요한복음은 왜 유월절을 기준으로 해서 종려주일을 기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종려주일과 유월절을 왜 이렇게 비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그 유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엑소도스할 때에 유래가 됩니다.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가는 걸 반대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의 장자들은 죽게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문 입구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패스오버, 넘어가셨다고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이 유월절이 유대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유대인들의 달력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의 달력에는 4월이 니산월인데, 유대인들의 달력에 니산월이 그 해의 시작입니다. 즉 1월입니다. 유월절이 바로 1월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명절들이 유월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유월절은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정신적이고, 문화적이며, 종교적인 근본이 되는 명절입니다. 유월절이 설날과도 같고,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와도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설날에 고향으로 가고, 미국 사람들이 추수감사절에 집으로 찾아가듯이 대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난 뒤 천오백년동안 내려온 유대인의 명절이며, 관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는 모르지만 유월절에 제물로 드린 양만 265000마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유월절 제사는 성대하게 치루었습니다.

 

그럼 왜 요한이 종려주일을 유월절을 기준으로 기록한 것일까? 캘빈의 주석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칼빈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유월절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유월절을 소중하게 여긴 것보다는 성전의 제사가 관습이 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고 했습니다. 단지 습관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이고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무리 좋은 일도 과거를 기억하며, 기념하여 해마다 모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천오백년이나 되는 유월절 제사를 지내면 그들 조상들의 숨가쁘면서도, 기뻐하던 모습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관습에만 남아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조금은 유월절에 얽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저의 딸 영후가 아빠와 함께 하였던 추억에 잠겨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는 아빠가 아니라 오늘 영후의 삶 속에 함께하는 아빠가 되길 원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고 함께 고민도 이야기하고 기도도 하며 지냅니다.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 종려주일을 맞이하시는 주님은 살아계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심정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기억되는 주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현실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님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종려주일 주님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이 유월절과 종려주일의 차이입니다.

제가 목회학박사 과정을 공부할 때에 저의 동기 가운데 한 분이 뉴저지의 버겐카운티의 한 도시의 담임목회를 했습니다. 이 도시는 뉴저지에서도 중고등학교의 성적이 좋은 전형적인 중산층의 도시입니다. 학생들이 있는 한인 부모님들이 학교 때문에 이사를 많이 옵니다. 그가 담임목회가 된 이 교회는 그 지역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남북전쟁 이전에 지어진 교회입니다. 교회의 입구에 1800년대의 유물부터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아직도 아름다운 내부를 보면서 참 관리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회는 백인과 한인들 합쳐서 40여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백인교회였는데 이십년전 교인들은 자꾸 줄어들고, 기존의 교인들은 나이 들어 돌아가시니까 교회가 활력을 찾기 위해 그 지역으로 이사를 많이 오는 한인들을 위해 교회를 개방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백인 목사와 한국인 목사가 공동담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두 분의 목회자와 한 분의 교육목사의 사례비며,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비용은 다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어디서 나올 것 같아요? 동기 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유형문화재인 교회를 유지하는데 한해에 10만불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 것 같습니다. 미국 목사님들 사례 부분은 분명합니다. 40여명의 교인들로는 두분 목사님 사례를 드리는 것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교회의 사택을 렌트를 줍니다. 웅장하게 지어진 교회 사택은 약 5천불 정도에 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나이드신 성도들마다 교회의 장로들이 나서서 생명보험을 들게합니다. 그리고 그 돈은 교회로 정합니다. 죽으면서 교회에 좋은 일하라고 합니다. 몇 년전에 수십만불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 돈으로 교회의 마이너스 재정을 메꾸어가고있는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미국교회가 갈수록 줄어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교회들 가운데에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교회를 움직이는 교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제 동기가 목회를 하는 그 동네는 렌트비가 비싸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관심이 적습니다. 헌금과 재정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산 성도들이 해야할 일들을 이미 죽은 성도들에게 감당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리는 교회, 이것이 오늘 미국 교회의 비극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유지되니 그러니 산자는 더욱 교회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의 생명보험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얼마나 활기찰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남북전쟁 전에 지어진 교회, 유형문화재이며 뛰어난 모습을 가진 교회이지만 그 속은 하나님을 기념하는 교회라면 진정 성령의 충만하신 은혜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비극도 이와 같지요. 헤롯이 20년에 걸쳐 지은 성전이라고 해도 이 성전에 모이는 이들이 자신의 신앙보다는 조상의 관습을 좇아 모인다면 말입니다. 거기에 무슨 신앙에 무슨 열의가 있겠습니까? 오늘 나의 신앙이 아닌 아버지 어머니의 신앙 때문에 마지 못해 하는 신앙생활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죽은 자가 살려가는 안타까움이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면 더 큰 비극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의 몸된 교회를 계속해서 죽은 자들에게 맡겨가는 산자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보다는 하나님을 기념하는 생활을 택하였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온 가족이 유월절 제사의 습관을 좇는 것으로만 만족해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변질되어가면서 유월절 어린양을 드리는 습관은 지켜야겠는데, 양을 고향에서 끌고오는 것이 너무도 귀찮으니까 돈만 들고 성전으로 찾아와서 성전 밖에서 양들을 파는 장사치들에게 양을 사서 유월절을 기념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조상들의 습관을 좇아서 죽은 자가 산자를 움직이는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왜 장사치들의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제가 어렸을 때의 일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저는 60년대 말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약 50년은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70년대는 한국의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에 학교에서 매일 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사를 하면서 보리를 섞었는지를 검사하고, 하루에 한끼는 밀가루 음식을 먹자며 수제비를 굉장히 많이 먹고 동네마다 국수공장이 하나씩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저의 아버지 월급이 쌀 한 가마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어려운 시절 저의 부모님은 집을 팔아서 이사갈 때마다 집 판돈의 많은 부분을 교회의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아마 수백만원은 드렸던 것 같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에는 당시 집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하시던 분들이 여러분 계실정도였습니다. 어려운 한국의 경제적인 현실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짐들을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짊어지고 가셨던 겁니다. 적어도 부모님 세대에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직접 겪으면서 살고자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기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참석하셨습니다. 그건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신앙이 맞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유월절을 기념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닌 오늘 내가 예배를 드렸으니 이것으로 주님과 관계가 다 되었다고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한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가로 갑니다. 무덤가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고 천사들이 이 여인들을 맞이합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우린 산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요 1장 3절과 4절입니다.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만물의 모든 것이 주님께로 부터입니다. 믿으시지요.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기념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움직인다면 주님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들을 바라보실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예수 기념교회가 아니라 예수가 함께 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하여 모든 일들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가야합니다.

 

사울왕에게 좇긴 다윗을 보면 그가 도망다니던 9년간 그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하였을지 이해가 됩니다. 승진하고 잘되기 위해서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도망다니느라 정신과 삶은 세상 누구보다도 피폐하였을 겁니다. 가족이 그를 외면하고, 유다지파는 그를 사울에게 넘겼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 두 번이나 도망을 갔습니다. 유다에 있을 때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황무지와 사막을 전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 고달프고 힘겨운 9년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시편 18편 1,2절에 그는 찬송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며 날마다 찬양하는 그의 신앙에 있었습니다.

 

터널과 동굴 같이 깜깜한 어두움입니다. 터널과 동굴의 차이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터널은 빛에 가깝습니다. 동굴은 더 깊은 어두움에 가까이 갑니다. 들어갈수록 절망과 좌절만이 깊어질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지금은 비록 어두움에 있더라도 결국 어두움을 이깁니다. 내가 있는 곳이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 되어서 이 어두움을 벗어나면 밝은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찬양한다. 정말 힘이 되었나?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군사를 보내셨나? 그가 좇겨 다닐 때 하나님이 사울의 군대를 벼락을 보내어 멸하셨나?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블레셋왕 아기스에게 두 번이나 피난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라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이 앞이 깜깜하게 막혀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결국 절망과 좌절밖에 없는 동굴이 아니라 밝은 빛이 드러나는 터널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셔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오늘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언제나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듯이 우리들의 삶 속에 임재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주님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주님이 나의 곁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오시던 주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우리들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종려주일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 오신 주님을 경험하며, 그 주님을 찬양하는 주일입니다. 음악의 어머니라고 하는 헨델의 가장 유명한 곡은 바로 ????메시야????입니다. 헨델이 메시야를 작곡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헨델은 몸이 자꾸 약해졌고, 음악활동을 잘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또 그 빚을 제때 빚을 갚지 못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를 고소해서 그는 그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어두운 감옥 속에서 헨델은 자기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자기의 곁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어두운 감옥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마치 그 옛날 사도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의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다시금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본 곡이 그 유명한 ????메시야???? 대곡입니다. 그 대곡을 쓰고선 그가 얼마나 감격해 눈물을 흘렸는지 그 눈물 자국이 원악보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헨델은 건강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눈도 실명하고 맙니다. 그는 마지막 죽기 직전의 고난 주간에, 자기가 지은 이 메시야를 직접 지휘하고 그 다음날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메시야 곡의 후렴 중 반복되는 부분은 ????그가 다스리신다 그가 다스리신다 만왕의 왕 그가 다스리신다????입니다.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다스리신다는 말이 43번이나 반복됩니다. 고난 중에 찾아오신 주님, 나의 어렵고 힘든 형편을 돌아보시며, 내게 은혜 주시고 나를 붙들어 주시며 위로하시던 주님 그 주님이 나를 다스리신다고 헨델은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헨델은 이 은혜가 너무도 귀하여 그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했습니다.

 

오늘 성경의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역사가 우리들에게 전해줍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망하는데 로마의 디도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기 3일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하늘 높이 올랐다고 합니다. 아무리 수많은 짐승을 잡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기념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입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기념해야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입니다. 그가 다스리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내 삶 속에 오셔서 나를 위하여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길 원하시는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나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시고 올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참된 헌신으로 나아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에도 귀한 은혜의 흔적을 남겨주실 것입니다. 우리 뉴저지개혁장로교회 성도 모두가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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