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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SUNDAY SERMON

달리다굼

막 5:35-43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달리다굼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41절에 주님께서 직접 "달리다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서 외치신 말씀입니다. 달리다굼은 고대근동 아시아의 언어인 아람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구약성경을 공부하신 성도들은 이해하실 것인데요.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이지요? 그리고 이들 나라를 이은 나라가 성경에는 바사,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이 나라의 언어가 무엇일까요? 예 아람어입니다. 오랫동안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를 지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자기들 나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잊혀지고 자기들을 다스리던 나라의 언어인 아람어가 더 익숙했을 것입니다. 오늘 미국을 사는 우리들은 쉽게 이해할 겁니다. 저의 아이들은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익숙합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갈릴리 아람방언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근처의 한 도시인 가버나움의 회당장인 야이로의 집에 직접 가셔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아람어로 달리다굼 외치셨습니다. 주님께서 "달리다굼" 외치시자 야이로의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람어 달리다굼은 "수리 수리 마술이"하는 마술사들의 주문이 아닙니다. 아람어 달리다굼은 한 단어가 아니고 문장입니다. 달리다와 굼으로 된 문장인데요. 달리다는 뜻이 '아주 작은 것, 불쌍한 것, 연약한 것, 어린 소녀'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열두살입니다. 야이로에겐 누구보다 소중한 딸입니다. 주님께선 이 아이에게 어린 소녀라고 부르셨습니다. 굼은 현재명령형 동사로서 영어로 'Get up' 즉,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 뜻을 종합해서 해석하면, "어린 소녀야, 지금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은 주님께서 외치신 달리다굼은 풍랑이는 바다를 향하여 말씀하시거나, 벳새다 빈들에 모인 수만명의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산상보훈을 선포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셔서 많은 무리들에게 외치신 음성도 아닙니다. 오직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 한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죽은 소녀이지만 그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연약한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니 지금 일어나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자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은 "달리다굼"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예수를 믿는가요? 그건 주님께서 나를 향해 "달리다굼" 외치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이지요? 마치 죽은 소녀처럼 잠들어 버린 내 삶이 다시 한번 일어나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갖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 안에서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주던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길 원합니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건강치 못하여 포기하고 싶은 삶에 새로운 소망을 갖고서 살기 원하며,  여러 가지 여건으로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었던 삶이 아직도 희망이 있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이란 말이 아니라 이 나이에도 은혜 주셔서 사명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가서 누구보다 큰일을 감당하길 원하시기 때문이지요? 주님 나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소망의 삶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향해 "달리다굼"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믿는 것은 주님께서는 나를 향해 달리다굼 외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를 향해 외치시는 달리다굼 음성을 듣고 죽음에서 일어난 소녀처럼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직 소녀를 향하여 외치신 주님의 음성이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도 외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것처럼 저는 몸이 아파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통해서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 아파보며 병원에서 언제 나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세상이 주는 약을 의지하고만 살아갈 수 없어서 매일 밤마다 교회를 찾아와 혼자 어두운 지하실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도 바로 달리다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를 저를 향해서도 “형기야 일어나라.” 말씀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달리다굼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교회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홀로 기도하며, 밤마다 해운대 초등학교 운동장을 스무바퀴 이상을 뛰면서 찬송하였고, 교회의 부흥회가 있으면 참석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믿었던대로 정말 주님 내게 달리다굼 은혜를 주셨습니다. 일어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향하여 달리다굼 외치십니다.

 

그래서 오늘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린 잘 이해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굉장히 철학적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을 경험하며 산다고 합니다. 누구나 죽음과 질병과 두려움과 죄 등의 한계상황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까뮈는 인생은 질병이나 권력의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이 있음을 페스트와 같은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계상황은 누구나 갖습니다. 인생은 곧 한계상황 안에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극복하였습니다. 달리다굼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이들은 모두 인간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났습니다. 죽음과 죄와 질병과 인생의 고통과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참 철학자들도 웃기지요? 한계상황에 묶여서 인생이 어쩌고 그럽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사실 달리다굼이란 아람어가 성경에 그대로 사용된 것을 가지고 학자들의 토론과 연구가 많았습니다. 한국의 석학인 이어령 박사는 이 부분을 가지고 해석하길 기호학적인 의미에서 달리다굼이란 말이 천국의 언어에 더욱 가깝다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목사님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는데요. 그런데 전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달리다굼 하고 하실 때 기호학이니 하는 학문적인 용어로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달리다굼이라고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에게 외치신 그 음성 그대로 우리들에게 전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나를 향해서도 달리다굼 외치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기 원하시는데 그 주님의 마음은 주님이 외치신 음성 그대로 달리다굼을 기록하였을 때 가장 잘 전달되겠지요? 주님의 음성 그대로 전하고 싶고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야이로의 딸에게 외치신 그 음성 그대로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 모두를 향하여도 똑같은 음성, 달리다굼 외치실 것을 믿기에 그 음성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믿습니다. 전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건강치 못하여 주님 앞에 나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않좋은 때에 주님 앞에 나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마치 야이로의 죽은 딸처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들고 주님 앞에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면 내 삶에 죽어있고 무너진 부분들이 "달리다굼" 주님의 음성이 가운데 일어나는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내게도 오늘 달리다굼 외치실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고 소망하시며 믿음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능히 달리다굼 외치시며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와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고, 내 안의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세상이 포기하라고 하더라도, 세상에서는 안된다고 하더라도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 앞에 오십시오. 주님께선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믿음에 열매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 앞에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김성화라는 승려가 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승려였는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서 절에서 자란 분입니다. 경북대 수학과를 졸업하여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이란 높은 직위까지 하신 정통 승려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승려의 길을 그만두고 제가 졸업한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이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성경을 읽고서입니다. 이분은 일년에 일천명의 승려를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불교대학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교육국장이 되었으니 꿈이 컸습니다. 하지만 불교 안의 정치 문제로 폭력사건에 연루되어서 감옥에 갑니다. 감옥에서 화엄경 법화경 승엄경 원각경 등 불교 경전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는데 어느날 이 경전들이 이미 대출이 되었다고 교도대원이 성경을 내밀었습니다. 교도대원이 그리스도인인 것 같습니다. 불교경전만 읽지 말고 성경도 읽으라고 했는데 그날 따라 김성화 승려가 호기심반으로 성경을 펼쳤는데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성이란 곳에 도달하시자 성문으로 한 장례행렬이 지나갑니다. 한 젊은이가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너무도 서글피 웁니다. 과부이고, 외동아들입니다. 이제 아무 가족도 없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서글픈 울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어머니를 향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며 죽은 청년에게 청년아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자 죽은 청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익히 들은 이 말씀을 김성화 승려가 읽었을 때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과부를 위로하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내시는 장면에 전율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상황이 똑같이 불교의 경전에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도에 귀사코타미라는 젊은 과부 여인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으매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길거리로 나가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내 아들을 살려줄 사람은 없나요?”라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치면서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저 여인의 동정만 살피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하나가 이 광경을 보고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지금 석가모니께서 기원정사라는 절에 계시니 죽은 아들을 데리고 가보시지요.” 여인은 마지막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서둘러서 석가모니가 있다는 ‘구시라’ 성 ‘시다림’이라고 하는 숲 속에 있는 절로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 갔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그를 찾아온 여인을 보자 석가모니는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여인은 석가모니에게 매달려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석가모니는 여인이 진정할 때를 기다려 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여인이여, 울음을 멈추시오. 그리고 일어나 마을로 내려가시오. 그곳에 이르거든 아직 한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만 골라서 쌀을 조금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그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요.” 여인은 죽은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소리에 귀가 번쩍하여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으며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여러 집을 돌아다녀 저녁이 되어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힘없이 석가모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가모니님, 하루 종일 보았지만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가정은 한 집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톨의 쌀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어서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여인이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시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했거늘,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도 나서 이윽고 죽는 법이오. 인연따라 일어나서 인연따라 사라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소.” 그는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한계상황에 갇혀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배웠습니다. 김성화 승려는 성경을 읽으니 경전의 석가의 이야기와 오버랩되어서 충격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극복하셨습니다. 석가의 이야기가 우습게 보입니다.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난 예수 믿어야겠다고 그 좋은 자리를 내려놓고 총신대학원으로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달리다굼" 하시며 죽은 소녀를 살리신 후, 예수님의 첫 마디는 “이 아이가 살아났다”가 아니었습니다. “얘 먹을 것 좀 갖다줘라”입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면 감동적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언제나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벗어난다고 해서 무엇을 할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냥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이니 그 이후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빚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든 빚을 갚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빚 갚는데 온 인생을 다 바칩니다. 실제로 빚을 갚고나서 살아갈 삶이 더 암담할 수 있습니다. 빚을 갚는 동안 건강을 잃어버려 힘든 일을 하기 어렵고,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다른 것을 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 빚을 갚고 나니 지치고 넋다운입니다. 오히려 그 뒤가 더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의 형편까지도 아시고 그 뒤에도 함께하시고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소녀가 살아나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소녀가 살아나서 살아갈 삶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먹고 힘을 내어서 살아갈 소녀의 앞날을 바라보시는 자비롭고 인자하신 이 모습이 이 한마디에담겨 있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달리다굼" 외치시는 주님께서는 먹을 것을 준비하며 허기진 우리들의 삶을 다시 채워주시고 일어설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우리들을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며, 당신의 피를 우리를 위한 신령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처럼 매일의 삶을 채워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인생은 늘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인생의 길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서 나아가야합니다.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렌트하여 있는 미국교회가 최근에 이 교회에게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팔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옆의 다른 미국교회로 옮겼습니다. 교회를 옮겨온 성도들을 자신들이 오랫동안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을 구입하길 원했습니다. 온 성도들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고, 주님께선 "달리다굼" 외치셨습니다. 놀랍게도 한국에서 사업차 오신 분이 우연히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교회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가 교회를 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도 안믿는 분입니다. 지난 달 목사님 한국에 가서 캐시로 오십만불을 받아서 교회 계좌로 보냈습니다. 이제 종잣돈이 만들어졌습니다. 교회를 구입하자고 하였습니다. 다된 것 같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부르며 왔습니다. 백만불이 넘게 책정하여 오퍼를 넣었습니다. 은행 론을 얻어야합니다. 그런데 장로님 코사인하길 거부하십니다. 거부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나가셨습니다. 장로님만이 아닙니다. 막상 교회를 구매하려고 하니 그 교회를 사겠다고 여러 교회들이 경쟁이 붙었습니다.

 

완전한 인생을 경험하길 원하지만 완전한 인생이 어디에 있나요?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완전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새로운 문제가 계속해서 터지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혹 자는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고난의 무게는 어느 누구나 다 똑같다고, 하바드를 나와도 세상에 누구보다 장수하여도 그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이것이 준비되면 저것이 부족하고 저것을 메꾸면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 완전한 인생은 없습니다. 달리다굼의 인생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은혜주셔서 연약한 가운데서 일어서며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완전한 인생은 없어도 대신에 달리다굼의 은혜로 채움을 받는 인생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한계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이것이 인생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인생은 심판의 게임입니다. 죽음을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들의 질병과 고통과 죄와 두려움과 불안을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부터 10절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달리다굼 외치시면 세상의 어떤 죽음도 사탄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망을 깨트리고 일어납니다. 고난과 두려움에서 놓임을 받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인생은 예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주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온전하여 지는 길은 완전하신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은 주님 곁에 있어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다스리신 주님 곁에 있어야 우리도 죽음을 이깁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일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서도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 곁에 있어야 우리도 잠잠한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다.

 

오늘 "달리다굼" 이라고 외치신 주님의 음성을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가 직접 듣고 기록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누가 본 겁니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이 장면을 보고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의 음성 "달리다굼"을 그대로 전해주길 원한 겁니다. 주님 곁에 있는 자들에게 외치시는 그 귀한 음성 "달리다굼"을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하며 사망에서 승리하신 주님을 알리려고 한 겁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야이로처럼 주님 앞에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어느 전도사님이 설교를 잘하고 싶은데 도저히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부흥사의 집회에 갔습니다. 부흥사가 하는 말들을 열심히 받아적었습니다. 부흥사는 처음 설교를 이렇게 하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안아본 여자 가운데 가장 따뜻했던 여자는 저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싸하더니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부흥사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그 여자는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자 웃음이 터져나오고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전도사님, 이걸 받아적어서 갔습니다. 교회에서 수요예배 설교하라고 하셨습니다. 강단에 올라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게를 깔더니 "지금까지 제가 안아본 여자 가운데 가장 따뜻한 여자는 저의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교회가 난리난 것처럼 싸해졌습니다. 그 교회는 굉장히 근엄하고 보수적인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순간 전도사님 당황해서 다음에 해야할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1,2분이 흘러갑니다. 도저히 기억이 안나고 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이 안납니다.” 오히려 더 곤란해졌습니다. 신앙이 복사가 아닙니다. 주님께 직접 나아가야합니다. 주님 곁으로 가야합니다. 야이로처럼 해야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그래야 기억이 나고 더욱 간절하게 붙들게 됩니다. 거기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더욱 큰 은혜로 충만케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향하여 달리다굼 외치시길 원하시고 준비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오직 주님만을 찾는 이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달리다굼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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